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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녹여 두었으니 휩쓸리지 않게 조심하세요

 

 

 

 

 정이겸은 소주잔을 든 손을 꼴사납게 흔들거리다가, 이은열의 얼굴을 한 번 쳐다보고, 사나운 표정을 짓더니 얼마 안 가 고개를 테이블로 처박았다. '그 일' 이후로 둘이 술자리를 가지는 일은 없었지만 정이겸이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가 되면 그의 동기들은 눈치를 보면서도 당연하다는 듯 이은열에게 연락했다. 정이겸의 정확한 집 주소와 비밀번호를 아는 몇 안 되는 사람 중에서 고작 유명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정이겸은 매번 이은열을 언급할 때마다 개새끼, 또라이, 미친놈 등등의 멸칭을 사용했으나 둘은 자주 붙어있었기 때문에 두 사람의 사이를 아직까지도 연인이라 착각하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평소 이은열의 행적 덕분에 그게 일방통행이라는 사실은 쉽게 묻혔다. '그런 일'이 있었는데도 잘 붙어 다니더라...... 과 내에서 떠도는 가십거리 수준, 사람들이 기억하고자 하는 건 대체로 그 정도였다. 종종 친했던 후배의 미묘한 표정을 볼 때마다 정이겸은 그대로 투명 인간이 되고 싶었지만 졸업이 코앞이었으므로 중도휴학보다는 과제에 집중하는 쪽을 택했다. 

 

 어쨌거나 이은열은 오늘도 당연하다는 듯 정이겸을 데리러 왔고 정이겸은 그게 여러모로...... 좆같다고 생각했다. 태연하게 웃고 있는 얼굴을 보자니 술이 더 마시고 싶어져서 집 근처 골목에 있는 편의점에 들어갔다. 청하 한 병을 집어 계산대에 올려두는데 옆에서 파워에이드가 불쑥 튀어나왔다. 씨발 새끼. 괜히 울컥해서 고개를 홱 돌렸다. 얼굴을 보면 울 것 같았다. 동시에 당장이라도 눈앞에 있는 술병으로 머리를 후려치고 싶다는 충동도 솟구쳤다. 따로 계산해 주세요. 이겸아. 나지막하게 부르는 소리가 들렸으나 정이겸은 무시하고 결제가 끝나자마자 편의점을 나갔다. 그리고 일부러 빠른 걸음으로 걸었다. 뛰는 건 자존심이 상했지만 그렇다고 일행처럼 보이기도 싫어서. 

 속내를 뻔히 알았을 텐데도 이은열은 꿋꿋이 따라와서는 정이겸과 보폭을 맞춰 걸었다. 여전히 뻔뻔하고, 여전히 나란하게......

 

 머리가 어지러웠고 가슴이 간질간질했다. 탁상을 펴지도 않고 바닥에서 뚜껑을 따 병 채로 입에 가져다 댔다. 난방을 끄지 않고 나간 탓에 방 안이 따끈따끈했다. 맥이 풀린 건지 취기가 더 올라서, 불만스럽다는 표정을 한 채로 벽에 기대앉아 있는 게, 그러니까 지금 나와 있는 사람이 이재열인지 이은열인지 헷갈렸다. 어차피 둘 다 똑같은 개새끼인 건 마찬가지므로 구분하는 건 무의미했지만...... 불현듯 속이 울렁거려서 정이겸은 짧게 한 모금만 넘기고 병을 내려놨다. 투박한 움직임 때문인지 충격에 못 이긴 액체 몇 방울이 바닥으로 튀었다. 휴지를 찾아서 닦으려는데 병을 잘못 건드리는 바람에 그 안에 있던 것이 전부 쏟아져 나왔다. 하, 씨―발...... 바닥에 고인 물을 훔치는 손이 자꾸만 미끄러진다. 문득 정이겸은 이 모든 상황이 억울하다고 생각했다. 기분이 급격하게 하강할수록 눈앞의 상대를 의식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노력하는 중이었는데, 정이겸. 제지하는 손길에 반사적으로 얼굴을 들고 말았다. 그냥 있어, 내가 할게. 노골적인 무표정. 이건 이은열이 화가 날 때마다 하는 버릇 중 하나였다. 이은열은 그대로 손을 겹쳐둔 채 대충 남은 휴지를 가져다가 바닥을 닦았다. 

 술 좀 적당히 마셔. 꼭 갈증이라도 난 사람처럼 이은열의 목소리가 갈라진다. 

 

 ......싫어. 네가 뭔데 지―랄이야.

 그걸 씨발 몰라서 묻냐?

 

 정이겸의 말이 끝나자마자 이재열이 불쑥 튀어나왔다. 잡고 있는 손에 들어간 힘 때문이 아니더라도 정이겸은 돌아오는 내내 이은열이 들끓는 이재열과 말들을 억누르고 있다는 걸 알았다. 그리고 뭘 위해 참고 있는 건지도 알았다. 그러나 고작 그런 것들은 북받치는 감정을 지우기엔 역부족이었다. 정이겸은 상식을 벗어나도 한참 벗어난 쌍둥이 사기꾼 덕분에 굳이 겪지 않아도 될 일을 너무 많이 겪었고, 그 여파로 아직도 바탕화면에서 휴학계 양식을 지우지 못하고 있었다. 열이 뻗쳐 얽힌 손가락을 빼내려는데 이재열이 단단히 힘을 주고 있어 잘 되지가 않았다.

 

 개―새끼야. 이거 안 놔?

 그리고 무슨 사이인지는 너한테 물어야지. 우리가 아니라.

 

 한 번, 흐릿한 정신 사이로 눈이 마주친다.

 보이는 모든 것들이 심하게 요동치는 바람에 정이겸은 잠깐 팔을 흔드는 걸 멈췄다. 속이 울렁거린다. 뚜렷했던 이재열의 파란 눈동자가 사방으로 흩어지고 나서야 정이겸은 자신이 울고 있다는 걸 알았다. 잘 참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번에는 제어할 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이재열은 놀라지도 않고 손에 힘을 풀어 축축해진 손가락을 정이겸의 볼에 가져다 댔다. 깜빡깜빡, 느리게 눈을 감았다 뜰 때마다 눈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너 존나...... 짜증 나.

 

 이재열은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술에 꼴아서 본인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잘 모를 터였다. 정이겸은 터진 둑 마냥 욕설을 쏟아냈다. 뭉개지고 늘어진 발음은 꽤 귀여웠지만 쏟아지는 비난을 듣고 있자니 속이 부글거려서 이재열은 다분히 의도적으로 얼굴을 가까이 가져다 댔다. ......진짜...... 또라이 새끼. 그 말을 끝으로 이어진 적막에는 묘한 긴장감이 실렸다. 

 정이겸의 뻣뻣한 눈가를 문지르며 이재열은, 다음에 일어날 일을 상상했다. 그날 이후로 정이겸은 술을 마실 때면 이렇게 울면서 욕을 하다가...... 잠잠해질 즈음에는 키스를 했으므로. 예상했던 것처럼 말랑한 입술이 겹쳐졌고 뒤섞인 혀에서는 여전히 알코올 맛이 났다. 이재열은 곁눈질로 제 소맷자락을 꼭 잡은 정이겸을 시야에 담았다. 술에 취해 키스할 때마다 정이겸은 등이 따끔거려 몸을 움찔댔다. 맞닿은 살결마다 죄책감으로 끈적거리는 것만 같았고 바닥에 깔린 나무 장판은 요동치다 못해 지천으로 무너지고 있었다.

 

 ......내가 제일 싫어......

 

 외설적인 소음을 깨고 훌쩍이던 정이겸이 반쯤 정신 나간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이재열은 이상하게 가라앉는 기분에 오래 전 정이겸에게 들었던 죄책감이라는 단어를 곱씹다가 관뒀다. 별로 이해도 되지 않을뿐더러 우느라 진이 다 빠진 애인을 재우는 게 먼저라는 제 형제의 의견에 동의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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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작과 마찬가지로 이 세계관에서도 이재열과 이은열은 쌍둥이인 척하는 이중인격이다 몸은 이재열의 것이나 원활한 대외 활동을 위해 사회에서는 이은열이 주로 나와 있는 편

 파워에이드는 정이겸이 술을 마실 때마다 꼭 먹는 숙취음료인데, 이은열이 자연스럽게 파워에이드를 챙기는 걸 보고 울컥했던 이유는 그 다정함에 괜히 간질거리는 마음 때문이기도 하고 과거 기억들의 잔여물 같은 느낌에 별안간 즐거웠던 장면이 회상돼서......

 글 시점으로 정이겸이 거부하고 있기 때문에 둘은 안 사귀고 있는 중이지만 이재열과 이은열은 정이겸을 그냥 애인이라 생각하고 있는 중 마지막 문장에서 정이겸을 '애인'이라 지칭하는 것도 같은 맥락